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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村松弘一, 小山田宏一, 柏倉伸哉, 福島恵, 呉吉煥, 李文基, 禹仁秀, 洪性鳩, 李志淑, 崔垠植, 李相勲 본 조사는 2006년 7월에 실시한 河内평야의 狭山池 조사를 근거로 하여, 그 문화・기술이 전해졌다고 생각할 수 있는 한반도의 수리유적과 도시와의 관계에 대해서 池를 중심으로 조사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 작업은 동시에 동아시아해 문명의 기반이 된 벼농사의 중국→한반도→일본열도로 연결되는 길을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12월 22일에는 김제시에 위치한 벽골제를 방문하였다. 벽골제는 4세기 백제왕권 아래에 건설된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기록에 남은 제방유적으로 3km에 걸치는 제방 및 석문이 남아있다. 조사결과 狭山池와 같은 敷葉工法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지만 제방의 보존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제방의 관개대상구를 확정하는 것은 어렵고 방조제가 아닐까라고도 말해지고 있다. 단지 이 일대는 한반도에서 가장 큰 호남평야이고 벽골제가 부여에 인접한 하나의 큰 농업지대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리시설이었다고 생각한다. 難波宮와 狭山池의 관계를 생각나게 한다. 12월 23일은 부여에서 백제왕릉군이 있는 능산리유적을 방문하였다. 능의 서쪽에는 능산리사 유적・백제나성이 있다. 나성도 敷葉工法에 따른다. 시내로 들어가서 궁남지를 방문. 이른바 苑池이다. 苑池의 문화는 중국에서 한반도로, 다시 일본 平城京의 東院庭園에까지 연결되어 있다. 12월 24일에 영천시 청제를 방문하였다. 금호강의 동으로 퍼지는 평야 동쪽에 위치한 관개연못에서, 암반에서 생긴 高台가 좁아진 부분에 제방이 쌓아 올려져 있다. 2기의 중수비가 있는데 하나는 康熙年間의 것이고, 또 하나는 표면에 丙辰銘(법흥왕 23년、서기536년), 뒷면에 貞元十四年銘(서기798년)이 보여진다. 그 후에는 경주의 안압지・서출지를 방문하였다. 12월 25일은 상주 공검지를 방문하고 안동에서는 최근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벼농사와 저수지의 유적이 발견된 우전리 유적을 방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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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森部豊, 中村威也, 福島恵, 陸長瑋 港班은 福建省 泉州 및 아모이의 항만도시 기능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였다. 12월 29일에 上海에 도착한 항반은 30일 오전에 福建省 泉州市에 항공편으로 이동하여, 鏑으로서 泉州市 해외교통사 박물관을 조사. 31일은 泉州西郊의 조사. 磁灶鎮에 있는 唐末부터 宋代의 가마로 일용품을 만들고 있던 金交椅山古窯유적, 일찍이 마니교 사원의 유적에서 마니불이 현존하는 草庵寺院, 安平橋, 마지막에는 六勝塔를 방문하였다. 여기에서 본 泉州湾의 풍경은 지도상에서는 얻을 수 없는 港湾都市・泉州의 지리적 경관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1월 1일은 泉州市内의 조사. 오전중 開元寺에 가다. 사원 건축물의 기둥에는 일찍이 泉州에 있었던 바라몬사원의 遺構가 사용되고 있다. 이 開元寺의 경내에는 古船진열관이 있고 泉州湾에서 출토한 宋代의 木造船・당시의 교역품목(향신료 등)이 전시되어 있어 泉州를 거점으로 한 남해무역의 양상을 알 수 있다. 오후에는 宋代 市舶司의 유적 이슬람사원을 조사. 市舶司遺址는 도움 없이 탐색하다가 길을 잃었다. 2일에는 泉州市東郊에. 明代에 건축된 왜구대책의 崇武古城을 조사. 오후는 洛陽橋, 宋代이래의 비석이 많이 현존하는 九日山에. 碑에는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것이 있고, 또 그 撰者에게서 市舶司 관계자의 이름도 보여 泉州가 교역거점으로서 번창하고 있었던 증거가 된다. 3일에는 厦門(아모이)에서 당일치기로 조사. 아모이는 근대이후 급속히 발달해 온 항만도시. 여기에서는 共同租界가 있었던 코론스섬, 南普陀寺, 胡里砲台 등에서 아모이의 경관을 조사하였다. 4일은 泉州市内의 媽祖를 모시는 天后宮을 조사. 廟의 건축물에는 開元寺와 같이 바라몬사원의 遺構가 사용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天后宮의 바로 앞은 宋代이래 泉州城의 남문이었던 徳済門의 유적. 현재는 발굴・정비되고 있다. 그 후 泉州시가지 옆으로 흐르는 晋江을 실제로 봄. 상당한 강폭을 확인할 수 있어서 직접 바다에 접하지 않은 泉州의 항만도시로서의 기능의 일단을 확인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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参加者: 鶴間 和幸、市来 弘志、長谷川 順二、塩沢 裕仁、宇都宮 美生、胡 雲生、王 大学 黄河班은 河南省 延津県~新郷市~衛輝市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목적은 이 지역에 남아있는 前漢期의 黄河 河道를 찾는 것이다. 黄河는 戦国이래 현재의 河道에서도 북쪽에 해당되는 이 지역으로 흐르고 있다. 前漢~後漢期에 黄河는 濮陽부근에서 河道를 바꾸지만 이 지역에서는 河道의 변경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규모의 변경이 일어나는 것은 金代가 된다. 이 지역에 있어서 黄河 河道의 특징으로는 上記한 대로 「古代~金에 이르는 오랜 시간에 걸쳐서 안정되어진 河道」라고 하는 점과, 「金代의 변경이후 河道가 다시 되돌아올 일은 없었다.」라고 하는 점이다. 黄河는 높은 泥砂含有量에 의해 양쪽에 자연제방을 형성한다. 故河道를 탐색하는 방법으로 하나는 黄河에 의해 형성된 자연제방을 찾아내는 것이다. 古代의 河道(自然堤防)는 그 이후에 일어난 홍수나 河川決壊 등의 水災, 또는 인간활동에 의해 파괴되고, 흔적이 사라진 것이 많지만, 이번 대상지역은 위의 두가지 특징으로부터 흔적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다. 현지에서 안내된 흔적의 하나로 太行堤(우측사진)가 있다. 현재 延津県에 있는 이 제방은 黄河에서는 30km정도 떨어져 있다. 『延津県志』에 의하면 古代黄河의 제방이라고 불린다. 제방주변은 砂地가 많아 제방자체도 모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 모래는 매우 미세하고 濮陽 부근의 古黄河, 또 済南에 흐르는 現黄河에서 보이는 모래와 닮았다. 아마도 이 모래는 古代黄河 由来의 그것일 것이다. 이 제방은 수년전까지는 10수미터의 높이였지만, 수년간 진행된 개발, 특히 중국에서 최근 진전되어진 고속도로의 건설에 의해 중앙부분이 깍여져 버렸다. 이번 조사에서는 2~3m정도의 높이가 남아있었지만 몇 년후에는 이마저도 사라져 버릴 것이다. 이런 절묘한 시점에 현지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은 큰 수확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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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浜川 栄、水野 卓、青木俊介、久慈大介、王 大学 운하반은 揚州・高郵・淮安의 현지조사를 행하였다. 문헌에 보이는 중국 최고의 운하 邗溝(揚州~淮安)와 동아시아해 문명의 관계를 탐색하는 것이 조사의 목적으로, 최대의 과제는 邗溝가 기초가 된 현「京杭大運河」(이하 대운하)의 航行이었다. 춘추시대인 기원전 5세기 전반, 오왕 부차가 邗城을 축조한 현 揚州市 西北角 蜀崗의 南東部로부터 폭 약 10m、길이3km의 「古邗溝」가 동으로 펼쳐져「大運河」로 통하고 있다. 그러나 邗溝의 揚州 이북의 渠道는「大運河」와 동일하지 않아, 약간 동북행하여 지금은 없는 射陽湖 등 많은 湖沼를 연결하여 淮河에 이르고 있었다. 長江・淮河를 거쳐 서해(黄海)로 통하는 邗溝는 6세기 隋代의 改修로 「대운하」의 일부가 되었고, 동아시아해 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唐代에 鑑眞(揚州 출신) ・圓仁 등 다수의 승려와 견당사가 빈번히 航行한 사실에서도 이를 수긍할 수 있다. 揚州~淮安 간의 「대운하」를 일부라도 航行하는 것이 이번 조사의 최대의 목적이었고, 또 최대의 난관이었다. 왜냐하면 현재 양주 부근의「대운하」에는 여객선이 없어 화물선밖에 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양주 시내에서는 그러한 교섭을 할 수 없어, 계획이 좌절되는 줄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양주 북쪽 교외의 邵伯으로 이동하여, 渡河하는 배의 선장에게 의논하자 흔쾌히 작은 氣船을 준비해 주었다. 그 결과 高郵市 까지 약36km、2시간 반의 航行이 실현되었다. 「대운하」의 수심은 최대 8m、폭은 최대 300m、예상한 이상의 규모였다. 빈번히 왕래하는 화물선의 화물은 대개가 화북에서 생산되는 석탄인 듯했다. 상해 등에서 수출하는 것일 것이다. 중국에서도 잊혀져 가고 있는 이러한 사실을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 이번 조사의 최대의 성과였다. 그러나 淮安 이북의 「대운하」는 현저히 황폐해지고 있다고 한다. 차년도 이후에는 그러한 지역을 조사하여 「대운하」의 마이너스 면에 대해서도 고찰을 심화시켜 가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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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鶴間和幸、鐘江宏之、家永遵嗣、 일본해(동해) 조사의 일환으로서, 상기의 일정으로 현지 조사를 행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는 青森縣 五所川原市에 위치한, 일본 중세의 대표적인 항만 유적인 十三湊를 중심으로 東北 및 道南의 역사와 일본해(동해)를 통한 교류와 교역을 전해주는 유적・박물관 등을 방문하였다. 조사의 전모에 대해서는 소개하기 어려우므로, 여기서는 十三湊 유적을 대표로, 조사의 개요를 소개하려고 한다. 十三湊 유적의 조사는, 먼저 현재의 十三湖와 그 주변의 모습을 걸어서 확인한 후, 역사민속자료관에서 十三湊 유적의 전체상에 대하여 이해를 심화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런 후에 五所川原市 교육위원회의 榊原滋高 선생의 안내를 받아, 舊 十三小學校(현재 十三湊 유적의 유물정리실)에서 유적의 개요에 대하여 설명을 듣고, 도자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출토 유물을 관람하였다. 그 뒤 실제 유적지를 걸어보고, 領主館 주위에 존재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堀跡 등을 실견하는 것으로 十三湊 유적의 조사를 끝마쳤다. 十三港 유적의 출토 유물은 현재 舊 十三小學校에서 정리・보관하고 있는 듯한데, 그 수가 매우 방대하여 중국・한국제 도자기를 많이 포함하는 등, 그 옛날 十三港의 번영을 충분히 그려볼 수 있었다. 또 榊原滋高 선생으로부터는 十三湊 유적의 구조에 대해서, 그리고 領主館과 家臣團의 저택이 있었던 지구와 商街 지구 간에는 성립 연대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이와 함께 최신의 발굴성과에 의거한 다양하고도 귀중한 교시를 받을 수 있었다. 또 겨울철 十三湖의 동결이나 강풍에 의한 모래의 퇴적 이야기도 현지조사에서만 가능한 귀중한 경험이었다. 이번 조사에서는 十三湊를 비롯한 十三湊 지역의 바다를 통한 교역・교류가 어떻게 성행하였으며, 또 광범한 지역에 미칠 수 있었는가를 실감할 수 있었다. 금후에는 더욱 조사를 심화하여, 교류를 행한 사람들의 활동과 그러한 활동이 가져온 물자의 이동 등 보다 전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